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철제 철장들이 무너져내렸다. 카무이가 그 철장들의 주인을 바닥이 울리도록 때려 눕힌 탓이다. 떨어지는 충격에 철장 문이 열리자 갇혀 있던 동물들은 빠르게 밖으로 뛰쳐나왔다. 자유를 향해 달음박질하는 순간에도 강자의 존재를 감지했는지 카무이와 반대된 방향이었다.
카무이는 멀어지는 동물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싸움 상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싸움 상대라는 말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는 말이다. 모든 동물을 지배하는 노예상이니 뭐니 거창한 수식어로 불리던 수인은 카무이와 채 열 합도 주고받지 못하고 쓰러졌다. 약한 것들 위에 군림하여 스스로가 강자인 줄 알던 한심한 놈의 말로다.
전투의 흥분으로 번들거리던 눈동자는 곧장 식어버렸고, 권태와 경멸이 섞인 시선이 주변을 느리게 쓸었다. 강자가 죽어버린 이곳에 더이상의 볼일은 없어 보였다. 그때 포식자의 눈이 어떤 기척을 잡아냈다. 무너진 철장의 구석에서 무언가가 움찔댔다.
몇 발자국을 걸어간 카무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토끼였다. 하얀색의 털을 가진 작은 토끼다. 토끼는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모두가 뛰쳐나간 순간 홀로 남았다. 철장 문이 바닥으로 떨어져 갇힌 걸까, 그러나 이음새가 부서진 철장은 열려 있었다. 다리를 다쳐 뛸 수 없었나, 몸을 덮은 털은 흠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이 토끼는 그저 도망가지 않은 것이다.
카무이는 손을 뻗어 토끼의 뒷덜미를 잡아올렸다. 원체 몸집이 작은 동물은 카무이의 한 손에 온전히 들어왔다. 드디어 두 토끼의 눈이 마주쳤다. 들어올려진 토끼의 눈은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유독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던 카무이는 그것이 물기로 가득 젖어 있기 때문임을 알아챘다. 머릿속에서 일렁거리던 잔상이 뚜렷하게 맺혔다. 카무이는 눈앞의 토끼에 한 여자를 겹쳐보았다. 어쩐지 뒷모습을 더욱 자주 보게 되었던 여자를. 쉽게도 낯을 붉히고 눈물을 보였던 사람을. 언젠가의 깊은 무의식에서 이렇게 목을 쥐어도 반항하지 않았던 존재를.
초점이 다시 눈앞의 털동물에게 향했다. 말 못하는 짐승은 둥글게 몸을 말고 있었다. 이토록 겁먹어 온몸을 벌벌 떨기만 할 것이면 기회가 왔을 때 도망치는 편이 나았을 터다. 그럼에도 겁에 질려 발조차 떼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본능적인 공포조차 이겨버린 나약함이다. 하얗고 무른 것들이라고는 죄다 이리 나약한 건지 궁금했다.
순간 카무이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붙들린 그 여자를 상상한다. 겁에 질려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여자가 반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속에서 불씨가 튀었다. 뜨거운 불쾌감이 무섭도록 들이닥쳤다. 이유 모를 살의가 온몸을 타고 뻗어나갔다. 그 열기가 손끝까지 도달하기 직전에, 토끼가 움찔거렸다. 카무이가 처음 발견했을 적처럼, 자신이 아직 살아 숨 쉼을 알리듯이 작게 움직였다. 얇은 가죽 아래로 맥박이 뛰었다. 카무이는 손안의 감촉을 생경히 느꼈다.
카무이는 붉은 양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토끼의 커다란 눈동자는 카무이를 향하지 않았다. 이제는 눈앞의 동물과 그 여자가 다른 점이 보였다. 그 여자는 제 눈을 똑바로 마주쳐왔다. 잡아먹힐듯 두려워 떨고 주저하면서도 투명한 눈에 오롯이 저를 담았다. 다르다. 달랐다.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중 진정으로 그 여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서서히 팔이 내려갔다. 그의 무의식은 붉은색을 지워내고 그의 앞을 그가 원하는 색으로 바꿔놓았다. 시야에 금빛이 차올랐다. 그것이 환상이나 착각따위가 아님을 아는 데에는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카무이."
카무이가 야토가 아니었다면, 신체의 모든 근육을 자유자재로 다루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 남자였다면 놀라 뒷걸음질을 쳤을지도 모른다. 눈을 조금 크게 뜬 것으로 반응을 끝낸 카무이는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유이."
"기다렸는데 오지 않아서, 찾고 있었어."
카무이는 눈을 한번 깜박였고, 유이도 그에게 설명을 바라지는 않았는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지금 손에 있는 건⋯⋯ 토끼야?"
카무이는 마찬가지로 시선을 내려 여전히 바들대는 토끼를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유이를 보았다. 그리고 토끼를 들어올려 유이가 토끼와 눈을 맞출 수 있게 했다.
"이 토끼는 네가 맡아."
카무이의 손에 잡힌 토끼는 허공에 붕 떠있는 것 같아, 유이는 급히 받아들고도 품 안의 작은 생물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예의 그 축축한 금빛 눈이 카무이를 향했다.
"왜 나한테 이 토끼를⋯⋯."
"죽이든 말든 알아서 처리하라는 뜻이야."
"카무이⋯⋯!"
카무이는 자신이 떠올린 형상과 완전히 같은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너와 닮았느니 네가 생각났느니 어쩌니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유이에게 토끼를 맡긴다고 그 토끼에서 본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지는 모르는 일이다. 서로의 나약함이 옮고 옮아 함께 피식자로 남는 결말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목숨이 덧없게 지는 이 세상에서, 저 나약한 두 생명의 생존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뭐, 살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토끼를 살피는 유이의 시선은 벌써부터 애틋해 보였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저것밖에 없는 것이다. 저들끼리 엉켜 서로의 나약함을 핥아주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강자인 카무이는 당연하게도 그 무리에 들지 않았다. 카무이는 방긋 웃어 보이며 뒤를 돌았다.
"나약한 것들은 나약한 것끼리 뭉쳐 살아야 하잖아?"
웅크리고 경직된 둘을 뒤로한 카무이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길을 나아가며 뒤늦게 생각을 덧붙였다. 자신은 저들의 생존을 기대한 적이 없다. 그저 그 나약한 것들이 당장 제 눈에 보이지 않길 바랐을 뿐이다. 강자가 살아남고 약자가 스러지는 것은 세상의 이치. 설령 그들이 낙오되어 흙길 위에 쓰러진다 해도 자신에게는 걸림돌조차 되지 않으리라. 나약함이란 카무이가 걷는 길의 반대에 있었기에.
- 해양